어느 날 갑자기 유럽 거래처 담당자로부터 이런 이메일이 옵니다.

“Dear partner, as part of our sustainability due diligence, we kindly request you to provide ESG-related documentation by [날짜].”

처음엔 “ESG가 뭐지?”부터 시작해서, 뭘 어디서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막막합니다. 거절하자니 거래가 끊길 것 같고, 그렇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편에서는 이 요청이 어디서 왜 오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를 설명합니다.

CSRD — 이 모든 요청의 출발점

CSRD(Corporate Sustainability Reporting Directive)는 유럽 기업들에게 ESG 정보를 의무적으로 공시하도록 요구하는 EU 지침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겁니다.

“유럽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은 매년 자사의 환경·사회·지배구조 현황을 보고서로 공개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CSRD가 요구하는 공시 범위는 자사만이 아니라 공급망 전체를 포함합니다. 즉, 유럽 원청사는 자기 회사 ESG 현황뿐 아니라 “우리 공급사들도 ESG를 잘 관리하고 있는가”를 함께 보고해야 합니다.

그 결과, 유럽 원청사들이 한국의 중소 제조 공급사들에게 ESG 자료를 요청하기 시작한 겁니다.

CSRD 적용 범위는?

2026년 기준으로 CSRD는 EU 역내 직원 1,000명 초과, 순매출 4억 5,000만 유로 초과 기업에 적용됩니다. 2025년 옴니버스 패키지로 당초보다 적용 범위가 축소됐지만, 이미 적용된 대기업들이 공급망 실사를 시작하면서 중소 공급사에 대한 요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요청이 한국 공급사까지 오는 경로

한국의 중소 제조사에게 ESG 요청이 오는 경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경로 1: 유럽 바이어 직접 요청

유럽 원청사 → 한국 공급사에게 직접 ESG 서류 제출 요청.

주로 이런 형태로 옵니다.

  • EcoVadis 평가 등록 요청
  • VSME 기준 데이터 제출 요청
  • 자체 공급사 행동규범(Supplier Code of Conduct) 서명 요청
  • 온실가스 배출량, 에너지 사용량 데이터 요청

산업기계, 전자부품, 의료기기, 화학소재, 섬유·의류 업종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경로 2: 국내 대기업을 통한 간접 요청

유럽 원청 → 국내 대기업(삼성, 현대, LG 등) → 1·2차 협력사(한국 중소기업)

국내 대기업들이 유럽 원청으로부터 ESG 공급망 실사 요구를 받으면서, 자신들의 협력사에게도 동일한 요구를 내려보내는 구조입니다. 유럽 수출을 직접 하지 않는 국내 납품 전문 공급사도 이 경로로 요청을 받게 됩니다.

무시하면 실제로 어떻게 되나요?

ESG 요청에 응하지 않거나 기한 내에 자료를 제출하지 못하면 다음과 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입찰 및 계약 기회 상실 유럽 공공조달, 대형 유통망 납품 입찰에서 ESG 평가 점수가 기준 미달이면 참가 자격 자체가 박탈됩니다.

기존 거래 관계 압박 장기 거래 관계에 있는 유럽 바이어가 “올해 안에 EcoVadis 등록 완료하지 않으면 내년 계약 갱신이 어렵다”고 통보하는 사례가 실제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납품 단가 협상력 약화 ESG 대응 체계가 없는 공급사는 “리스크가 있는 공급사”로 분류되어 단가 협상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국내 대기업 협력사 등록 취소 국내 대기업들이 공급망 ESG 실사를 강화하면서, ESG 점수가 기준 이하인 협력사를 등록에서 제외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요청이 더 늘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

세 가지 구조적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 1: 규제가 완화됐어도 시장 요구는 그대로

2025년 옴니버스 패키지로 CSRD 적용 기업 범위가 축소됐습니다. 하지만 이미 CSRD를 적용받는 대기업들과 자발적으로 ESG 경영을 추진하는 기업들의 공급망 실사는 계속됩니다. 법이 완화됐다고 거래처의 요청이 줄지는 않습니다.

이유 2: 독일 공급망법(LkSG)은 별도로 작동 중

독일과 거래하는 기업이라면 LkSG(Lieferkettensorgfaltspflichtengesetz, 공급망실사법)도 고려해야 합니다. 독일 대기업들은 LkSG에 따라 공급망 내 인권·환경 리스크를 관리할 의무가 있으며, 이를 위해 한국 공급사에게 자체 설문지를 발송합니다.

이유 3: 국내 규제도 강화 중

환경부, 금융위원회, 중소벤처기업부 모두 중소기업 ESG 지원 및 요건 강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 중입니다. 유럽 요청이 없더라도 국내 규제 대응 차원에서 ESG 데이터 관리가 필요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것

ESG가 무엇인지 몰라도, 전담 팀이 없어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거래처에서 구체적으로 뭘 요청하는지 파악하기

거래처 요청 이메일을 다시 읽고 아래를 확인하세요.

  • EcoVadis 평가 등록을 요청하는가?
  • VSME 기준 데이터 제출을 요청하는가?
  • 자체 설문지 형식으로 요청하는가?
  • 어떤 항목을, 언제까지 제출해야 하는가?

둘째, 같은 상황을 먼저 겪은 동종업계 사람 찾기

같은 업종에서 유럽 수출을 먼저 시작한 기업의 담당자를 찾아보세요. KOTRA, 무역협회 세미나, 업종별 협회 네트워크가 출발점이 됩니다. “어떻게 대응하셨어요?”라는 질문 하나로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습니다.

셋째, 내부 데이터가 어디 있는지 파악하기

ESG 요청에서 가장 많이 요구되는 데이터는 에너지 사용량, 온실가스 배출량, 임직원 현황입니다. 이 데이터가 어느 부서 어느 담당자에게 있는지 지금 파악해두면, 다음 요청이 왔을 때 대응 시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다음 편 예고

다음 편에서는 실제로 유럽 거래처에서 오는 ESG 요청의 유형을 비교합니다. EcoVadis 평가, VSME 자가보고, 원청사 자체 설문 — 이 세 가지가 어떻게 다른지, 어떤 거래처가 어떤 방식을 요청하는지를 정리합니다.

→ 편 2: EcoVadis, VSME, 원청 설문… 뭐가 다른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