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초, 유럽에서 중요한 규제 변화가 있었습니다.
“CSRD 적용 범위가 대폭 줄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혹시 “그럼 이제 ESG 요청이 줄어드는 건가요?”라고 생각하셨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한국 중소 제조 공급사 입장에서는 달라지는 게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요청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편에서는 2025–2026년 유럽 ESG 규제의 변화가 무엇인지, 그리고 한국 공급사에게 실질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정리합니다.
옴니버스 패키지 — 무엇이 바뀌었나
2025년 2월, EU 이사회는 CSRD와 CSDDD를 간소화하는 ‘옴니버스 패키지’를 채택했습니다.
바뀐 것: CSRD 적용 기업 범위 축소
기존 CSRD 적용 범위:
- 단계적으로 직원 250명 이상 대기업, 이후 중소기업까지 확대 예정
옴니버스 이후 변경:
- 직원 1,000명 초과 AND 순매출 4억 5,000만 유로 초과 기업으로 상향 조정
- 즉, 당초 CSRD 적용 예정이었던 수천 개 기업이 의무 대상에서 제외
바뀌지 않은 것: 이미 적용 중인 기업들의 공급망 실사
CSRD가 이미 적용된 대기업들(2024–2025년부터 의무 시작)은 공급망 실사를 계속 수행해야 합니다. 규제 완화는 신규 적용 기업의 의무를 줄인 것이지, 기존 적용 기업의 의무를 없앤 것이 아닙니다.
”규제가 완화됐다”는 말이 공급사에겐 의미 없는 이유
한국 중소 제조 공급사 입장에서 규제 완화가 의미 없는 이유가 세 가지 있습니다.
이유 1: 우리는 CSRD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
CSRD는 EU 역내 기업에 적용됩니다. 한국 중소기업이 CSRD 직접 적용 대상이었던 게 아닙니다. 우리가 영향을 받는 건 CSRD 적용을 받는 유럽 원청사들이 공급망 실사를 통해 우리에게 데이터를 요청하는 간접 경로였습니다. 이 경로는 그대로입니다.
이유 2: 시장 요구는 규제보다 빠르다
법적 의무보다 앞서서 ESG를 경영 원칙으로 채택한 유럽 기업들이 많습니다. Bosch, Siemens, IKEA, H&M 같은 기업들은 법적 강제 이전부터 공급사 ESG 데이터를 요구해왔고, 규제가 완화됐다고 이 요구를 철회하지 않습니다.
이유 3: 거래처를 다변화할수록 요청이 늘어난다
유럽 수출을 확대하거나 거래처를 늘리는 것은 중소 제조사의 성장 방향입니다. 거래처가 많아질수록 ESG 요청 건수도 늘어납니다. 규제 완화와 무관하게 우리가 받는 요청의 총량은 증가합니다.
독일 LkSG는 그대로다
CSRD 논의와 별개로, **독일 공급망법(LkSG, Lieferkettensorgfaltspflichtengesetz)**은 옴니버스 패키지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LkSG는 EU 지침이 아닌 독일 자국법이기 때문입니다.
LkSG가 한국 공급사에게 미치는 영향
독일 기업(직원 1,000명 이상)은 자사 공급망 내 인권·환경 위험을 관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한국 공급사에게 다음을 요구합니다.
- 인권 정책 및 리스크 평가 수행 여부 확인
- 강제노동·아동노동 방지 선언서 (공증이 요구되는 경우도 있음)
- 공급사 행동규범(Code of Conduct) 서명
- 환경 위험 관리 계획
독일과 거래하는 한국 공급사라면 CSRD와 별도로 LkSG 기반 요청에 대비해야 합니다.
VSME 법제화 가능성과 타임라인
2025년 7월 EU 집행위원회가 VSME를 공식 권고안으로 채택한 것은 중요한 신호입니다.
현재 VSME의 위치
- 자발적 보고 기준 (법적 의무 아님)
- EU 집행위원회 공식 권고안으로 채택됨
- 은행, 투자자,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ESG 데이터 요청 시 이 기준 사용 권장
앞으로의 방향
EU는 VSME를 CSRD의 “자발적 연계 기준”으로 활용하면서, 향후 공급망 데이터 요청의 표준 양식으로 자리잡게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명시적인 법제화 일정은 아직 없지만, 사용이 확산될수록 “사실상의 표준”이 됩니다.
실무적 의미: 지금 VSME로 한 번 데이터를 정리해두면, 이후 요청 형식이 VSME로 표준화되더라도 추가 준비 없이 대응할 수 있습니다.
국내 대기업 공급망 ESG 요구 확산
유럽 규제와 별개로, 국내에서도 중소 공급사에 대한 ESG 요구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주요 동향
대기업 공급망 ESG 평가 확산 삼성, 현대차, LG, SK, 롯데 등 국내 대기업들이 협력사 ESG 평가를 정례화하고 있습니다. 일부는 EcoVadis 등록을 요구하거나, 자체 협력사 ESG 설문을 발송합니다.
정부 정책 방향 환경부, 금융위원회, 중소벤처기업부 모두 중소기업 ESG 지원 및 요건 강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 중입니다. 공급망 ESG 관리에 대한 가이드라인과 지원 프로그램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결론: 유럽 수출이 없더라도, 국내 대기업 협력사라면 ESG 대응 체계를 갖춰야 하는 시기가 됐습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것 vs 나중에 해도 되는 것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선순위를 정해서 단계적으로 접근하세요.
지금 당장 해야 할 것
① 에너지·온실가스 데이터 수집 시작 Scope 1·2 배출량은 모든 ESG 요청에서 반드시 나오는 항목입니다. 지금부터 전기·가스 청구서를 월별로 모아두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준비된 겁니다.
② 보유 인증서 만료일 확인 CE 인증서, ISO 인증, 납세증명서의 만료일을 지금 확인하세요. 6개월 내 만료 예정 서류가 있으면 갱신 일정을 잡아두세요.
③ 제출 이력 정리 지금까지 어느 거래처에 어떤 자료를 제출했는지 한 곳에 정리해두세요. 다음 요청이 왔을 때 “지난번에 A사에 낸 거랑 비슷하네”를 바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6개월 안에 해야 할 것
④ VSME 기본 모듈(B1–B11) 데이터 최초 정리 처음이라 시간이 걸리지만, 한 번 정리해두면 이후 요청에 재사용할 수 있습니다. 편 3: VSME 완전 정복과 편 4: VSME 실전 대응을 참고하여 항목별로 작성하세요.
⑤ 내부 ESG 데이터 취합 체계 구축 부서별 담당자 연락처, 연간 데이터 업데이트 루틴(편 5 참고)을 만들어두세요.
나중에 해도 되는 것
⑥ EcoVadis 등록 요청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선제적으로 EcoVadis에 등록하는 것은 비용 대비 효과가 낮습니다. 거래처에서 요청이 왔을 때 준비하면 됩니다.
⑦ 온실가스 감축 목표 설정 VSME 심화 모듈(C3)에서 요구하는 항목이지만, 기본 모듈도 아직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감축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순서가 맞지 않습니다. 데이터 수집이 자리잡힌 이후에 고려하세요.
⑧ 제3자 검증 ESG 데이터의 외부 감사·검증은 대기업 수준의 공시 의무가 생기기 전까지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시리즈를 마치며
6편에 걸쳐 유럽 거래처 ESG 요청의 전체 흐름을 다뤘습니다.
편 1에서 요청이 왜 오는지를 이해했고, 편 2에서 요청 유형을 비교했으며, 편 3·편 4에서 VSME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뤘습니다. 편 5에서 재사용 구조를 만드는 방법을, 그리고 이 편에서 앞으로의 변화 방향을 정리했습니다.
ESG 요청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번 체계를 갖춰두면, 다음 요청부터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아도 됩니다.